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나치 당원들의 사회 계층 === 나치당원들은 모두 저학력자 하층민 깡패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나치 하면 돌격대 깡패를 떠올렸기 때문에 인적구성상 수가 많은 돌격대의 이미지를 나치의 이미지로 착각하게 되는데 먼저 돌격대와 나치 당원을 구분해야 한다. '''돌격대는 1924년 맥주홀 폭동 이전에는 나치당 하부 조직이 아니었다.''' 1925년 나치당이 재건되며 명목상으론 나치당 하부 조직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히틀러의 직속 조직'''이라서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돌격대원들은 "우리는 [[제3제국]]의 군인, 나치 당원은 민간인이다!" 라는 주장을 통하여 전혀 통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당원들의 입당비와 매월 당회비로 운영되었는데 돌격대는 나치당 집회에서 경비를 서주면서 '''돈을 받아먹었지 당비를 내는 당원이 아니었다.''' 물론 돌격대 지휘자급들은 나치 당원이나 나치당 당직과는 겸직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일반 돌격대원 상당수는 나치당원이 아닌 셈이다. 또한 돌격대도 처음에는 히틀러의 명령으로 [[루돌프 헤스]]가 대학생 100인 모임을 만들 정도로 후기 이미지와 전혀 다르며 이후 돌격대가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군대처럼 조직을 만들어 나갈 때 지도자급은 '''대부분 제국 시절 장교 출신'''이며 패전 후 [[자유군단]]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이었다. 초기 돌격대에서 활약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장군과 [[에른스트 룀]] 이전에 돌격대를 이끌던 페퍼 폰 잘로몬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폰(Von)자 들어가는 귀족 출신이었다. 더 높으신분으로 바이마르 후반에는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와 이탈리아 왕의 사위이자 헤센-카셀의 필리프 왕자도 돌격대에 가입한다. 물론 돌격대의 하부 인적자원들은 대부분은 중하위 계층 사람이었던 건 사실인데 패전 후 [[초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이 발생하며 바이마르 시절 '''독일 내에 부랑자나 실업자가 넘쳐났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일 평균에서도 그닥 많은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나치당 초기 구성원을 보면 자물쇠 수리공 안톤 드렉슬러가 창건자라지만 다른 멤버들 면모로 디트리히 에카르트(문학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를 다니다가 때려치고 시인 평론가가 된다. 후에 나치당 초기 아무런 배경이 없는 아돌프 히틀러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고트프리트 페더(엔지니어 출신, 후에 베를린 공대 교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러시아 제국 망명 교포로 모스크바에서 정식 건축가 교육을 받았다.후에 나치 이론가로 나치당 인종국장을 맡았고 2차 대전 시기 오스트란트(발트3국)장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 [[카를 하우스호퍼]](뮌헨대학 교수), [[한스 프랑크]](변호사) 등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 모임''' [[툴레]] 협회 멤버들이 주축이었다. [[루돌프 헤스]]도 툴레 협회 출신이다. 바이에른 출신이지만 후에 북독일에서 활약한 당내 행정가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약사 출신으로 후에 제약회사 부사장을 지냈다. 나치당에는 박사 학위자도 [[빌헬름 프리크]](법학)나 [[프리츠 토트]](공학)처럼 [[괴벨스]]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괴벨스 수하의 선전부 직원으로 빠지는 나치당 베를린 관구와 나치당 선전국 멤버들은 350명 중 절반 이상이 대졸자요 박사학위자도 상당수였다. 제3제국 시대 나치당 지도부의 사회 계층을 보자면 히틀러는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실업학교 고등과정 중퇴)지만 세무서장의 아들[* 정확하겐 세관장이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도시 [[브라우나우암인]] 출신으로 히틀러의 아버지는 그 도시 세관장이었다. 아버지가 은퇴 후 [[린츠]]로 이주한다.]로 프티부르주아 출신이며 [[헤르만 괴링]]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총독]]의 아들에다 역시 부유한 집안이었고, 루돌프 헤스는 해외교포 출신으로 부유한 상인 집안이었고 둘다 전쟁때 공군장교라 아비투어(대학입학 시험)이 면제되어 뮌헨대학 진학이 가능했지만 괴링은 그냥 스웨덴으로 가서 재벌 여자와 결혼하고 헤스는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툴레]] 협회 인맥들과 나치당에 가입한다. 힘러는 농경제학 석사 출신이고, 나치에서 농업 분야를 맡았던 발터 다레는 농학 박사과정 중퇴로 역시 석사학위가 있다. 괴벨스야 널리 알려진 박사이고, 로젠베르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건축가, 내무 장관 프리크는 앞서 소개한대로 법학박사, [[발터 풍크]]는 나치당에서 후에 경제 장관이었지만 원래는 언론인 출신이다. 초기 히틀러의 후원자요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낸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무역상이면서 무려 [[하버드]] 졸업생[* 1934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나치당 인사 신분으로 졸업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하버드의 흑역사로 꼽힌다.]이며, [[히틀러 유겐트]]를 이끈 [[발두어 폰 쉬라흐]]는 자기 집도 잘 살았지만 외가가 미국서 [[은행]]가 집안이었다. 괴벨스 밑에서 선전부 차관을 하다가 후에 히틀러의 유언에서 힘러 대신 친위대장으로 임명된 [[카를 항케]]는 전직 고교 [[교사]]였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법대를 나와 법학 박사와 변호사를 했으며,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주인공인 베셀도 원래는 법대생이다. 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았어도 독일에서 주류사회의 일원으로서 상류층에 능히 속하고도 남았다. '''중졸자인 히틀러와 그나마 대화가 통해서 총애받은 [[마르틴 보어만]]도 고등학교는 졸업했다.[* 중퇴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18세때 자원 입대하여 중퇴가 아니라 참전자 혜택으로 조기졸업 처리 되었다.]''' 이후 나치당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나치 당원이 늘어나게 되는데 '''또 전형적인 이미지와 달리''' 당원들 대부분은 교사, 공무원, 소상공인 출신이 대다수였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지지도도 상당히 높았다. 세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독일 국가인민당]], [[가톨릭 중앙당]], 바이에른 인민당, [[독일 인민당]] 등 기존 보수정당들의 지지층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흡수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공무원이나 농민, 기득권층들의 지지도 얻을수 있었것이었다. 나치당 초기를 지나 정권을 잡기 전에도 나치당은 '[[공무원]] 당'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교사 공무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 국가 Der Staat Hitlers(1969년)>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szat) 著] 노동자 계층 출신은 당명과 괴리가 클 정도로 적었는데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에 대한 노동조합 지지가 꾸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치당 집권후에 독일의 경제가 일시적으로 살아나고 소련침공 초기 시기까지는 독일이 잘나가는것처럼 보였기때문에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가 높아자기는 했지만 후에 노동자계층이 제3제국에서 나치당에 호의적이었는지 여부는 학자마다 학설이 강하게 충돌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결코 '''못 배우고 무식해서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국민 평균으로 보아도 나치 지도부 출신은 평균적으로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해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